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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본 숫자가 이후 판단을 끌고 간다

룰렛 숫자를 보여줬을 뿐인데 추정치가 따라 움직였습니다

읽는 데 약 5분 아이모토
처음 본 숫자가 이후 판단을 끌고 간다

협상 자리에서 먼저 숫자를 부르면 손해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실험 결과는 반대를 가리킵니다. 먼저 나온 숫자가 판을 정하거든요.

룰렛을 돌리고 유엔 회원국 수를 물었더니

카너먼과 트버스키의 실험 중 유명한 것이 있습니다. 참가자 앞에서 룰렛을 돌려 숫자가 나오게 한 뒤, 아프리카 국가가 유엔 회원국 중 몇 퍼센트를 차지하는지 추정하게 했어요.

룰렛은 질문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참가자도 그걸 압니다. 그런데도 큰 숫자가 나온 조건의 추정치가 더 높았습니다. 완전히 무관한 숫자가 판단의 출발점이 된 거죠.

무관한 숫자를 먼저 본 조건과 그렇지 않은 조건의 추정치 차이
출발점이 어디냐에 따라 결론까지 달라졌다

이 현상을 앵커링(anchoring)이라고 부릅니다. 사람은 판단할 때 어딘가에서 출발해 조정하는데, 그 출발점이 결과를 끌어당깁니다. 그리고 조정은 대개 충분히 이뤄지지 않아요.

왜 조정이 부족할까

사람은 '충분히 그럴듯한 값'에 도달하면 조정을 멈춥니다. 정답을 찾을 방법이 없으니 더 이상 이상해 보이지 않는 지점에서 정지하는 거죠. 출발점이 높으면 그 지점도 높아집니다.

그래서 앵커는 알아채도 잘 안 없어집니다. '저 숫자는 상관없는데'라고 생각하면서도 판단은 이미 그쪽에서 출발한 뒤거든요. 실험 참가자들도 룰렛이 무관하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흔히 하는 말먼저 부르는 쪽이 불리하지
실제로는먼저 부른 숫자가 범위를 정해요

협상에서 먼저 숫자를 부르면 불리하다는 통념이 여기서 흔들립니다. 먼저 부른 숫자가 협상의 범위 자체를 정하거든요. 상대는 그 숫자를 기준으로 깎을지 올릴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조건이 있어요. 터무니없는 숫자는 앵커로 작동하지 않고 협상 자체를 깨뜨립니다. 근거를 댈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유리한 쪽 끝이 효과적입니다.

견적서에서는 순서가 일을 한다

견적을 낼 때 안을 몇 개 놓느냐, 어떤 순서로 놓느냐가 이미 협상입니다. 가장 비싼 안을 위에 두면 아래 안이 합리적으로 보이고, 싼 안을 위에 두면 아래 안이 비싸 보여요. 같은 금액인데도 그렇습니다.

비싼 안을 위에 둘 때와 싼 안을 위에 둘 때의 인상 차이
같은 금액인데 순서만으로 읽히는 값이 달라진다

안이 하나뿐이면 비교 기준이 없어서 고객은 다른 회사 견적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우리 견적서 안에 기준을 만들어두는 편이 유리하죠.

다만 네 개 이상이면 앞서 다룬 선택 과부하가 걸립니다. 세 개 정도가 실무적으로 무난해요.

협상 자리에서도 같습니다. '예산이 어느 정도세요'라고 먼저 묻는 것과 우리 범위를 먼저 제시하는 것은 결과가 다릅니다. 후자가 유리한 경우가 많아요.

앵커는 금액에만 걸리는 게 아닙니다. 일정도 마찬가지예요. '얼마나 걸릴까요'라는 질문에 '보통 6주에서 8주입니다'라고 답하면 그 범위 안에서 논의가 이뤄집니다. 아무 말 없이 상대가 '2주면 되죠?'를 먼저 꺼내면 그때부터는 2주를 기준으로 늘려가는 대화가 되고요. 같은 프로젝트인데 출발선이 다릅니다.

수정 횟수, 페이지 수, 회신 시간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우리가 먼저 적어두지 않으면 고객이 어딘가에서 본 기준을 가져옵니다. 그 기준이 우리 조건과 맞을 이유는 없죠.

숫자에는 근거가 붙어야 한다

앵커가 오래 버티려면 근거가 필요합니다. 숫자만 던지면 상대는 그 숫자를 기준으로 삼기 전에 왜 저 값인지부터 묻습니다. 답이 없으면 앵커가 아니라 그냥 부른 값이 되고, 그때부터는 깎기 협상이 됩니다.

반대로 근거가 붙으면 숫자가 자리를 잡습니다. '이 규모의 사이트는 평균 몇 주가 걸리고, 그중 어느 단계에 얼마가 들어간다'까지 오면 상대는 그 구조 안에서 조정하게 되거든요. 범위를 정한 셈입니다.

여기서 지킬 선

제시할 안은 실제로 제공 가능한 것만 넣어야 합니다. 팔 생각 없는 비싼 안을 기준용으로만 올려두면, 고객이 그걸 고르는 순간 곤란해져요. 그때 못 한다고 하면 나머지 견적의 신뢰도 같이 무너집니다.

그리고 앵커링은 사실을 왜곡하는 데 쓰면 안 됩니다. 원래 없던 정가를 만들어 할인처럼 보이게 하는 건 표시광고법 문제로도 이어집니다.

고객이 이미 시장 가격을 잘 아는 경우에는 효과가 약해요. 반복 구매자나 여러 곳에서 견적을 받아본 담당자에게는 앵커가 잘 안 걸립니다. 이때는 근거로 승부하는 편이 낫습니다.

견적서를 만들 때 정할 세 가지

  1. 제시할 안은 실제로 줄 수 있는 것만 넣기
  2. 비싼 안을 미끼로만 쓰지 않기. 사겠다면 만들어야 하니까
  3. 기준은 만들되 사실을 왜곡하지 않기

세 가지 다 같은 자리에서 나옵니다. 앵커는 기준을 먼저 세우는 일이지 없는 값을 지어내는 일이 아니라는 것.

반대편도 알아두면 좋습니다. 우리가 견적을 받는 쪽일 때는 상대의 첫 숫자가 앵커로 걸립니다. 그때 쓸 만한 방법이 하나 있어요. 받기 전에 우리 예산 범위를 먼저 적어두는 것입니다. 적어두면 그 숫자가 내 기준이 되고, 상대가 부른 값에 덜 끌립니다.

숫자를 어디에 놓느냐가 이미 협상입니다. 다만 그 숫자에 근거가 없으면 오래가지 않습니다.

출처 카너먼과 트버스키가 정리한 앵커링 효과. 참가자 앞에서 룰렛을 돌려 숫자를 보여준 뒤 아프리카 국가가 유엔 회원국 중 몇 퍼센트인지 추정하게 했더니, 큰 숫자가 나온 조건의 추정치가 더 높았다. 룰렛은 질문과 아무 관계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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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앵커링 효과란 무엇인가요?
판단의 출발점이 결과를 끌어당기는 현상입니다. 사람은 어딘가에서 출발해 조정하는 방식으로 판단하는데, 그 조정이 대개 충분히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처음 본 숫자가 최종 판단에 그대로 영향을 남깁니다.
룰렛 실험은 어떤 것이었나요?
카너먼과 트버스키가 참가자 앞에서 룰렛을 돌려 숫자가 나오게 한 뒤, 아프리카 국가가 유엔 회원국 중 몇 퍼센트를 차지하는지 추정하게 했습니다. 룰렛은 질문과 아무 관계가 없고 참가자도 그걸 압니다. 그런데도 큰 숫자가 나온 조건의 추정치가 더 높았습니다.
왜 조정이 충분히 안 되나요?
사람은 충분히 그럴듯한 값에 도달하면 조정을 멈추기 때문입니다. 정답을 찾을 방법이 없으니 더 이상 이상해 보이지 않는 지점에서 정지합니다. 출발점이 높으면 그 지점도 높아집니다.
협상에서 먼저 숫자를 부르면 불리하지 않나요?
앵커링 관점에서는 반대입니다. 먼저 부른 숫자가 협상의 범위 자체를 정합니다. 상대는 그 숫자를 기준으로 깎을지 올릴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다만 터무니없는 숫자는 앵커로 작동하지 않고 협상 자체를 깨뜨립니다. 근거를 댈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유리한 쪽 끝이 효과적입니다.
견적서는 어떻게 구성하면 되나요?
안을 몇 개 놓느냐와 어떤 순서로 놓느냐가 이미 협상입니다. 가장 비싼 안을 위에 두면 아래 안이 합리적으로 보이고, 싼 안을 위에 두면 아래 안이 비싸 보입니다. 같은 금액인데도 그렇습니다. 안이 하나뿐이면 고객은 다른 회사 견적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세 개 정도가 실무적으로 무난합니다.
앵커링을 쓸 때 지켜야 할 선은 무엇인가요?
제시할 안은 실제로 제공 가능한 것만 넣어야 합니다. 팔 생각 없는 비싼 안을 기준용으로만 올려두면 고객이 그걸 고르는 순간 곤란해지고, 못 한다고 하면 나머지 견적의 신뢰도 같이 무너집니다. 원래 없던 정가를 만들어 할인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표시광고법 문제로도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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